청자골 강진! 다산...그의 마음을 그리다

문화 / 조현희 / 2011-11-28 09: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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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만의 전경
[일요주간 조현희 기자]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萬德山)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선생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여 동안 적거생활(謫居生活)하는 동안 이곳에서 10여년을 거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였으며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다산 정약용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됐다.



▲ 동암의 전경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 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 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위대한 업적을 이곳에서 대부분 이루었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붕괴되었던 것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1958년 기와집으로 변형 및 복원하였고, 그 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산초당에는 다산선생이 직접 병풍바위에 「丁石」이라는 글자를 새긴 정석바위, 직접 수맥을 찾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의 재취가 남아있는 다산4경과 흑산도로 귀양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고향이 그리울 때 심회를 달래던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학문을 사랑했던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18년 동안 고락을 함께 하였으나 순조가 즉위하자마자 당쟁에 휘말리면서 난신적자로 몰려 경북 장기를 거쳐 강진으로 유배당했던 다산...다산은 이곳(천일각)에 올라 무엇을 생각했을까? 하늘같은 임에게서 버림받고 ‘땅 또는 바다의 끝’으로 유배당한 자신을 한탄했을까?


그도 인간이기에 임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그리고 분노를 지녔을 터 그러나 더 이상 권좌에 욕심을 내지 않고,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며 마지막까지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어찌하면 더욱 풍요롭게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를 고민하며 수많은 저술로 백성을 어루만지며 자신을 승화시켜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마음을 그리워하게 한다.


▲ 오솔길
나고 자란 곳이 아니기에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마땅히 교류할 사람을 찾지 못했던 다산은 다산초당에서 오솔길로 800m 오르면 있는 백련사에 갔다가 추사 김정희의 스승인 옹방강이 ‘해동의 두보’ 라고 칭송할 만큼 뛰어난 혜장선사를 만나게 된다.

혜장선사는 불가의 학승이면서도 유교의 경전에 관심이 깊어 다산이 다산초당에 기거하면서 본격적으로 차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고 때로는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함께 차를 마시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다산의 다도애(茶道愛)는 더욱 깊어졌고, 혜장의 유교지식 또한 넓어졌다.


성군의 사랑을 한 몸에 받다가 하루아침에 난신적자로 몰려 18년을 유배생활을 한 다산...
그러나 원망과 분노가 아닌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충정과 위민의 마음으로 온전히 그의 생을 보낸 그를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계속되는 정치적 분열과 갈수록 힘들어지는 경제상황, 거기에 울릉도가 자신의 땅이라며 울릉도 방문을 위해 입국하려는 일본 자민당 의원들 때문에 더더욱 그의 마음이 그리운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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