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㊳]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문화 / 이은화 작가 / 2025-06-16 09:4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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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늬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 잠풍날씨: 바람이 잔잔하게 부는 날씨
* 달재: 달째. 달강어(達江魚).
* 진장(陳醬): 진간장. 오래 묵어서 진하게 된 간장
* 자꾸


▲ 이은화 작가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 시 평론 ) 이 시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에 읊기 좋은 시인 듯해요. 꽃샘바람이 잠들고 연둣빛 잎들이 진초록으로 짙어가는, 잔잔한 바람이라는 뜻을 갖는 ‘잠풍’과도 잘 어울리는 시이니까요. 이 시의 화자가 즐거운 이유는 사소하고 소박합니다. 그런데 시 전체 분위기가 쓸쓸하게 읽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탓’이라는 이유를 들어 쓸쓸한 감정을 중화시키는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그런데 정작 외면하고자 하는 이유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좋고, 사랑하고, 고마움을 탓으로 돌리는 화자에게서 가난과 슬픔과 사랑의 절망이 느껴지지요. 겉으로는 담담하지만, 속은 외로운 정서가 아이러니한 감정을 보이는. 이렇듯 쓸쓸함을 외면한 시는 화자의 서글픔에 대한 수용과 거절의 경계가 엿보입니다.

우리도 살아오는 동안 외면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을까요. 각자 이유는 다르지만, 시인의 ‘외면’과 공감되는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현실을 외면하고 싶을 때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세요. 심리적 방어를 위해 부정하거나 회피하진 않는지, 또는 자기 위로와 유머로 웃음 뒤에 진심을 감추진 않는지요. 감정이란 풍경처럼 다층적이라 느끼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애상감이 잠풍처럼 깔린 시에서 햇볕 냄새가 나네요. 그 당시 시를 썼을 작가의 시간은 아마 흰 빨래 널기 좋은, 잔잔한 바람이 머리칼에 닿을 듯한 날씨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햇볕 구경 가기 좋은 날이에요. 오늘은 백석의 시와 함께 걸어보면 어떨까요.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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