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 88] 안개꽃

문화/People / 이은화 작가 / 2026-07-06 11:5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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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꽃

허향숙


장미의 그늘로
양귀비의 여백으로
백합의 숨소리로

한 번도 문장의 주어가 되지 못한 삶
평생을 배경색으로만 번져오신 당신

그러나
장미가 낙화의 비명을 지르고
양귀비가 열흘의 붉음을 탕진할 때
백합의 결백이 먼지처럼 꺼져갈 때

오로지 제 횐빛을 잃지 않고
낮게, 더 낮게 제 별자리를 지키신 당신

지나온 세월이 그대로 당신의 문면文面입니다
이제 당신이 이 생의 유일한 주어입니다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 시 감상 ) 사람들은 대부분 인생을 화려한 꽃처럼 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행사장 명단에서 맨 아래 적히는 이름은 아닌지, 안개꽃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한 번도 문장의 주어가 되지 못한 삶”이라는 구절처럼, 우리는 서브 꽃으로 자리를 채울 때가 많지요. 자신의 이름은 오래 입은 옷의 소매처럼 조금씩 닳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요.


그런데 별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낮은 자리에도 서로를 비추며 무리 지어 빛나는 별자리가 있지요. 삶이란 높은 자리에서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는 일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를 이루는 일일 테니까요. 수수한 안개꽃처럼요. 화려함은 순간 시선을 사로잡지만, 은은한 품격은 오래도록 보는 이의 마음을 바꿉니다.

그래서 이 시는 그동안 타인의 삶을 챙겨 온 이들에게 바치는 한 편의 헌사가 아닐까요. 풍성한 안개꽃을 떠올리는 여름, “이제 당신이 이 생의 유일한 주어입니다”라는 문장은 그래서 더 깊은 위로가 됩니다. 명사보다 조사처럼 살아가는 날이 많은 우리. 이제 여러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핸드타이드로 자신의 이름을 장식하는 주인공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분명, 아름다울 거예요.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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