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여왕은 쉬지 않고 뛰고 있지만 세상도 그녀와 함께 뛰고 있기 때문에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자리에 있고 싶으면 죽어라 뛰어야 한다”고 앨리스에게 충고합니다. 인생에 대한 현장감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묘사한 문장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루이스의 지적처럼 인간은 감성과 이성이라는 두 개의 다리와 시간이라는 에너지로 生과 死가 끝없이 이어진 둥근 선로 위를 달리는 존재입니다.
실재와 환영·내부와 외부 또 긍정과 부정 그리고 모순과 정반합 사이를 쉼 없이 오가면서, 세상에 속해 세상을 상대로 세상을 쟁취하기 위해 쉼 없이 싸우면서 말입니다.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이 시작인가 하면 끝이고 끝인가 싶으면 시작인 그 선 위를 영원히 달려야 하는 인간 모두는 시지프스들인 셈이지요.
모로 가든 날고뛰며 가든 기어가든 어쨌든 인간은 이 선상에서 몸을 누이고 곧추세우며 생의 그래프를 그려갑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장애물도 만나지만 무엇보다 불행과 절망 그리고 고통과 슬픔이라는 정류장도 반드시 지나게 됩니다. 그렇게 몇 번의 전쟁을 치르고 나면 자기만의 병법이 생깁니다.
적이든 장애물이든 어느 것 하나도 간과할 수 없는 인연들임을 인지하게 되고, 불행과 절망·고통과 슬픔이 다름 아닌 행복과 희망·평화 그리고 기쁨과 일란성 쌍둥이라는 사실도 인정하게 되지요.
또 감성과 이성이라는 두 개의 다리가 때론 칼과 방패로 소용된다는 사실도 생의 전리품 항목에 적어 넣게 됩니다.
그러나 인생에 전쟁의 시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인 한가로운 시간”도 있습니다.
한가로움이란 스스로가 만든 마음으로만 볼 수 있는 세상이지요. 핏물이 흐르는 전쟁터에서도,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인 그 순간에도 꽃을 발견할 수 있는 밝은 마음과 웃을 수 있는 마음 말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여백이 있고, 여백이 있는 생의 궤적에는 늘 자유라는 꽃이 피고 바람이 붑니다.
앨리스가 가게 된 거울 반대편의 나라는 모든 것이 ‘거꾸로’입니다. 이 뒤죽박죽 나라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현실과는 정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하얀 여왕은 결과가 먼저 있고 사건은 나중에 생긴다고 말하고, 붉은 여왕은 원하는 곳에 가려면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루이스의 충고처럼 이 세상은 거꾸로 혹은 반대로 보아야 그나마 삶의 여백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인지도 모릅니다.
요즘과 같이 삽시간에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세상에서는 특히 더 말입니다.
어느새 일 년의 반이 지났습니다. 날은 덥고 하는 일마다 꼬이고 빗나가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고난의 연속인 삶을 긁어대며 오히려 염증을 부채질합니다. 계절을 둘러보는 일은 고사하고 하루도 제대로 느낄 새 없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넋두리로 세월만 보낸다면 우리도 붉은 여왕처럼 세상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이 더 ‘빨리빨리’ 하며 등을 밀수록, 세상이 더 ‘많이많이’ 하고 외칠수록, 일개 사람을 그나마 인간답게 만들어주었던 덕(德)과 의(義)가 무너져 내릴수록, 자신만이 들어갈 수 있는 거울나라 하나쯤 갖는 것은 어떨까요?
세상이 아무리 희희낙락하며 들썩거려도, 홀로라도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 ‘마음에 걸어둔 풍경(風景)’ 하나쯤 간직하고 살면 어떨까요?
환경에 꺼둘리고 사는 일에 지쳐 신물이 오를 때면 나는 마음에 걸어둔 풍경을 꺼내곤 합니다.
해거름이 기웃거리고 산바람이 어슬렁거릴 무렵 초옥(草屋)을 휘감고 돌던 풍경소리에 마음이 한없이 설레었던 풍경입니다.
풍경의 소품도 되어보고 그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주인공이 되는 상상도 해봅니다. 어느새 향방 없이 흐느적거리던 삶이 가지런해집니다.
그렇게 한동안 노닐다보면 그 풍경은 서서히 고대 그리스의 광장 아고라로 변해갑니다. 나는 광장 맨 앞에 서서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홀린 듯이 듣고 있습니다.
“잘 되겠다고 노력하는 일 이상으로 잘 사는 방법 없고, 실제로 잘 되어 간다고 느끼는 것 이상의 큰 만족은 없다. 이것은 내가 오늘날까지 살아오며 경험하고 있는 행복이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한 것을 내 양심이 증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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