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흥행을 타고 깨어난 3000년 전 고전이 21세기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다. 클리스토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관객의 눈길을 붙잡으며 고대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다시 불러냈다.
신의 뜻을 따르지 않고 운명에 저항하는 인간의 오만함과 그로 인한 파국은 고대 그리스 비극을 관통하는 주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이 운명에 순순히 따르기만 했다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이야기도 없었을 것이다. 서사는 바로 운명과 인간이 부딪히는 자리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는 오디세우스를 7년간 섬에 억류했던 님프 칼립소가 오디세우스를 떠나보내면서 건넨 말이다. 원전에는 없는 대사지만, 영화가 품고 있는 인간의 운명과 잘 맞닿아 있다.
"당신은 운명을 스스로 통제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지, 하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어, 그냥 폭풍 속으로 틀어가, 포세이돈 앞에 엎드려서 순순히 벌을 받으라고. 제우스가 목숨을 지켜줄 거야 대결하려 하지 말고 통제하려고도 하지마. 그저 살아남아. 이번만큼은 믿음을 갖고 자신을 던져보라고, 오디세우스"
이 말은 오디세우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때로는 뜻밖에 폭풍을 만난다. 아무리 지혜와 경험을 동원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있고, 애써 통제하려 할수록 더 깊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때로는 자신을 내맡기고 견디는 힘인지 모른다.
그렇다고 운명에 순응하는 것만이 인간의 모습은 아니다. 오디세우스는 갖은 지략으로 고난을 헤쳐나가며 고향 이타카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가 돌아간 곳은 여정을 떠나기 전의 이타카가 아니며, 그 역시 출발할
때의 오디세우스가 아니다. 긴 방황과 상처와 선택의 시간을 통과한 인간은 결국 이전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는 이야기가 생긴다.
누군가는 지금 인생의 폭풍 한가운데 있을 것이다. 길을 잃고 표류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난을 지나온 뒤에는 그 시간조차 자신의 삶을 이루는 하나의 서사가 된다. 평온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에는 어쩌면 이야기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운명과 부딪히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오디세우스라'는 이름에는 '미움 받는자' 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신의 노여움을 사고,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끝내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을 생각하면 묘하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칼립소가 섬에 남아 자신과 함께 영생을 누리자고 설득했을 때도 오디세우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원한 것은 신의 몫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언젠가는 누구나 떠나야 한다. 그러나 유한하기 때문에 삶은 오히려 더 절실하고, 그 절실함이 이야기를 만든다. 오디세우스가 3000년을 시간을 건너 오늘의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 것처럼. 서사가 있는 인간은 사라져도 그가 걸어온 길과 선택과 고난은 이야기로 남는다.
영원한 것은 신의 몫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남길 가장 오래된 흔적은 결국 이야기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모두 저마다의 오디세우스를 살아가는 중이다. 폭풍을 피할 수 없다면, 그 폭풍을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 그것이 결국 우리 삶의 서사가 될 테니까.
일요주간 / 최철원 논설위원 ch258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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