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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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영은 시인 |
●선생님을 떠올리면 제주의 낭만적 시인이라는 이미지가 깊습니다. 제주를 오가는 선생님의 생활을 많은 분들이 로망하는데, 이와 달리 어려운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입장이 궁금합니다.
▼낭만이란 말을 사전적 의미로 풀이하자면,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를 말하는 것인데요. 그런 의미에서 저를 제주의 낭만적 시인이라 표현해 주신 것에 대해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사실, 그러한 낭만을 실천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가끔 가족이 내려오거나 상경해서 가족과 조우하는 것 외엔 외로움과 고독을 동반자로 삼아야 하는 날이 더 많고, 김을 매거나 텃밭에 심은 과실나무도 제때 돌봐줘야 등, 물리적인 에너지를 써야 하는 노동의 나날들이 주로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했을 때는 시인과 농부라는 두 가지 역할을 감당하는 일이 즐거움이었지만 제 나이가 칠순이 되다 보니, 병원을 찾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이 가장 큰 고민입니다.
●2024년 『너머의 새』 를 발간한 지 1년 만에 아홉 번째 시집 『그리운 중력』을 상재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 시집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너머의 새』를 출간한 후 두어 차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목숨을 위협할 만한 병은 아니었지만, ‘게실염과 신장비대증’으로 고통을 받던 중, 지인이 강력히 시집 출간을 추천했습니다. 병색이 완연한 저를 보고 내심 걱정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발표한 시가 100편 정도 남아 있었던 터라, 그 마음의 깊이가 고마워 출간을 서두르기로 했습니다. 게실염과 신장비대증은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는 지병으로 저를 긴장시킵니다만, 그 외의 것들은 많이 호전되어서 일상 생활하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
이번에 낸 시집 『그리운 중력』은 삶의 근원, 언어의 심연, 기억의 다층적 구조, 그리고 세계와의 교감을 시적 감각으로 탐사해 본 시집입니다. 고통, 상실, 사랑, 시간, 자연, 우주 등의 주제를 풀어내기 위해, 단지 감정의 표출에 머물지 않고, 언어 이전의 감각, 말해지지 않는 울음까지도 시의 세계로 끌어들이려 노력했습니다. 이에 대해 고봉준 평론가는 “『그리운 중력』이라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중적 방식의 시 읽기가 필요하다. 먼저 독립적 공간들이 펼쳐 보이는 미학적 풍경을 중심으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복수의 공간들이 어우러짐으로써 서서히 드러나는 세계의 풍경에 주목해야 한다. 이 풍경의 핵심은 ‘나’에 관한 존재 물음이다.”라는 평을 주셨습니다.
●그동안 여러 시집을 내셨는데 특별히 애정이 가는 시집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이, 모든 시집이 제게는 자식이어서 어느 한 권을 내세우기가 좀 그렇습니다.(^^) 시집을 낼 때마다 제가 추구하는 언어와 세계를 균일한 무게로 담았습니다. 첫 시집은 시에 대한 순수성과 진정성이 애틋한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두 번째 시집은 “시인은 거짓된 진실, 허구적 진실을 독자에게 설득시키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라는 <피카소>의 말처럼 창작의 진정성에 대해 좀 더 열린 마음을 갖고 쓴 시집입니다. 세 번째 시집은 몸에 대한 물질성 탐색과 시 자체에 대한 메타적 인식이 주를 이룹니다. 네 번째 시집은 언어의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기 위해 표현이 생각을 능가하는 공격적인 美를 시도 해 본 시집이고, 다섯 번째 시집은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언어를 보다 깊은 시적 세계 속에 담아 본 시집입니다. 여섯 번째 시집은 체험한 다양한 삶을 통해 만났던 세계를 고전과 결합시켜 법고창신의 이미지를 내세워 본 시집입니다. 여덟 번째 시집은 서울과 제주를 오가면서 느낀 자연 서정과 도시 서정을 문명과 자연이라는 두 갈래의 방향에서 모색해 보았습니다. 지금껏 시집을 되돌아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시 속에서 나를 발견한 일입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보다 심화 된 고찰은 아홉 번째 시집인 『그리운 중력』에서 찾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여러 시집에서 좋은 작품들이 많지만 그래도 독자분들께 소개해 주고 싶은 시가 있다면 작품은 어떤 시일까요.
▼ 이번 시집의 표제시를 소개할까 합니다.
그리운 중력重力
평생 걷다가 한 번쯤 만나는 그대가 극지極地라면 함박눈 쌓이는 하룻밤쯤은 극지로 가는 열차를 꿈꾸어도 좋겠네.
기차보다 먼저 도착하는 기적 소리에 실려 한 번도 닿지 않은 그대 마음속, 극지로 떠나보는 것도 좋겠네.
함박눈 맞으며 걷고 있는 나는 여기 있지만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지, 얼어붙은 빙하가 녹고 있는지 묵묵히 선 빙벽 아래 길을 내고 고요 속에 싹 트는 한 송이 꽃을 기다릴 수 있으리.
지구상에 홀로 남은 동물처럼 가다가, 서다가, 돌아서서 울다가 얼어붙은 대지와 한통속이 된들 어떠리.
발자국만 남긴 그림자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미증유의 존재면 어떠리.
만남은 여기보다 조금 더 추운 곳에서 얼어붙고 헤어짐은 여기보다 조금 더 따뜻한 곳에 닿고 싶어 하는데
마지막 남은 눈사람처럼 눈 감고 귀 닫고 오로지 침묵 속에서 그대에게 닿을 순간을 기다리네.
나 여기 포근한 함박눈 속에 누워 있으니 그대 함박눈 속을 다녀가시라. 모든 길은 몸속에 있으니 목적지目的地가 어디든, 다녀가시라.
목숨이 오고 가는 길도 하나여서 녹아내리는 손바닥 위의 눈송이, 나, 함박눈 같은 극지에 도착하네. 함박눈 쌓이는 하룻밤이 수목한계선에 눈꽃으로 피네.
●작품을 쓰고 후배들을 챙기며 <어둡거나 환한 문장>이라는 블로그 역시 활발하게 운영하고 계시는데 이런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제 블로그는 일상과 문학, 그중에서도 주로 시 장르를 소개합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식처일 뿐 아니라, 시를 통해 영감을 나누고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운영한 지 20여 년 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많은 분이 찾아주시고 즐겁게 감상해 주셔서 나름대로 보람이 생겼습니다. 시와 시인을 알리는 데도 한몫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저를 즐겁게 합니다. 영국 시인. P.B.셸리는 "시는 최상의 마음의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하나의 시란 그것이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의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힘들지만, 삭막한 세상에 잠시 쉬었다 가는 영혼의 그린벨트를 만들려는 소박한 책임감이 원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2년 현대시 인터뷰에서 “먼 훗날에도 제주가 낳은 시인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신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 고향인 제주는 어떤 곳인지 궁금합니다.
▼서울과 마찬가지로 고향 제주는 저에게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가진 공간이라 생각합니다. 문명과 자연을 동시에 지닌 그 양가성이 시인의 삶을 살아가는 저에게 더할 나위 없는 영항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고 블란서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장 그르니에>가 말한 바 있습니다. 제주는 제게 시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글짓기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섬을 둘러싼 바다가 창살 없는 감옥처럼 느껴질 때면 바닷가 언덕으로 달려갔습니다. <바슐라르>는 ‘상상력은 현실을 변용시키는 능력’이라고 했고, <칼 세이건>은 ‘인간은 상상력 없이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는 고향 바닷가의 둔덕이나 갯가에 앉아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던 그때, 저의 문학적 소양도 함께 자라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마음에 단단히 새겼습니다. 그 길 외에는 다른 꿈을 꾸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붐비는 서울에 살면서도 고독을 앓는 것은 생래적으로 제주의 바람과 햇살을 몸속에 지닌 탓이며, 하나의 거대한 섬과 같은 문학의 삶을 사는 까닭이 아닌가 합니다. 「지슬」은 그러한 저를 대변해 주는 시이기에 이 시를 들려드리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지슬
나는 드디어
말 상대를 고안해냈다.
거기 누구 없소? 소리칠 때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나밖에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내 귀의 바깥은 그 속삭임을 듣지 못한다.
내가 섬일 때
날다가 지진 갈매기들이 섬에 집중할 때
갈참나무 잎사귀처럼 침몰하는 귀가
저절로 닿는 심연, 그 아득한 깊이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목소리
그것이 설령,
내 몸의 줄기에서 뻗어나간 것일지라도
놀란 흙 밖으로 튀어나온 그것을
나는 지슬이라 불렀다.
그럴 때 나는
불타오르는 산이고 쏟아지는 빗줄기이고 숲을 뒤덮는 바람이고 계곡에 넘쳐 흐르는 물
나는 드디어
나의 고독과 대화하는 나를 가지게 되었다.
나의 예언은 어디에서 오는지
나의 방언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마침내
감옥이고 차가운 별이 되고 마는
나의 독백을
대화체로 바꾸어주는 시(詩)를 가지게 되었다,
흙무덤에서 파낸 그것을
나는 지슬이라 불렀다.
* 지슬: 감자를 뜻하는 제주어
제주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강영은 시인의 최근 아홉 번째 시집 『그리운 중력』은 존재, 언어, 자연과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과 나라는 존재에 대해 보다 심화된 고찰은 담아냈다. 모든 시집에 균등한 무게로 언어와 세계를 담으려 노력했다고 밝힌 시인은 블로그 <어둡거나 환한 문장>을 20여 년째 운영하며 시와 시인을 알리는 데도 노력하고 있다. 시인에게 고향 제주는 상상력의 원천이며, 시의 여명기로 작가의 문학 인생을 형성한 중요한 공간이다. 이에 「지슬」은 자신을 상징하는 시로, 시인의 내면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몸속의 언어라고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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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화 작가 |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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