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도 기술도 없던 시절, 세계 1위 제련소 일궈…한국 제련기술 자립의 산증인
친환경 제련·사회공헌으로 ‘녹색 경영’ 실천…韓 산업계에 남은 불멸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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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이 향년 8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진=고려아연 제공) |
[일요주간 = 임태경 기자] 고려아연을 세계 1위 비철금속 기업으로 키워낸 ‘비철금속 업계의 거목’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이 향년 8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고려아연은 최 명예회장이 숙환으로 지난 6일 서울대병원에서 영면했다고 밝혔다. 임종은 부인 유중근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아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지켰다.
◇ 자원 불모지에서 ‘세계 1위 제련소’를 만들다
1941년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난 최 명예회장은 1974년 고려아연 창립 멤버로 참여한 이래 평생을 제련산업의 토대를 다지는 데 바쳤다. 그가 회사를 맡았던 시절, 한국은 자원도, 기술도, 경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국제 금융기관 IFC를 직접 설득해 4500만 달러 규모의 자금을 확보했고 당시 누구도 시도하지 않던 ‘직접 시공 방식’을 택해 제련소를 완공했다. 이는 훗날 “신의 한 수”로 불리며 한국 제련 기술 자립의 시발점이 됐다.
그는 설립 초기부터 “세계 최고 기술을 도입하되, 남이 한 것을 따라가지 말고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을 고수했다. 기술 연구소 설립, 퓨머(Fumer)와 DRS 공법 등 선도적 기술 개발을 주도했고 호주에 아연제련소 SMC를 세우며 글로벌 제련 네트워크를 완성했다.
그 결과 고려아연은 세계 최대 광산업체와 제련수수료(TC)를 협상할 정도의 기술력과 신뢰를 인정받으며 ‘세계 제련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 “혁신보다 변화”…꾸준함으로 이룬 100년 기업의 초석
최 명예회장은 생전에 “혁신이나 개혁은 이미 늦은 것이다. 매일 조금씩 발전하면 큰일을 할 필요가 없다”며 ‘꾸준한 변화’를 경영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의 경영 철학은 단순하지만 강력했다. ‘기본에 충실한 정도경영(定道經營)’, ‘조직력 중심의 경영’, 그리고 ‘사람이 먼저인 경영’이었다.
그는 스타 플레이어보다 팀워크를 중시했다. 2014년 창립 40주년 사내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려아연의 성과는 누군가의 공이 아닙니다. 전 직원이 함께 만든 결과입니다. 스타플레이어도 좋지만, 탄탄한 조직력이 더 중요하지요.”
그의 말처럼 고려아연은 ‘전 직원이 만들어가는 회사’라는 신념 아래 38년간 무분규, 102분기 연속 흑자라는 업계 신기록을 세웠다. IMF와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도 단 한 번의 구조조정 없이 회사를 지켜냈다는 사실은 그의 ‘사람 중심의 경영’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기술 중심·친환경 제련의 기틀 세운 ‘현장의 경영자’
최 명예회장은 제련 산업이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인식을 깨기 위해 친환경 제련 기술 개발에 집중했다.
아연 잔재를 시멘트 원료로 재활용하는 기술을 상용화했고, 자원 리사이클링 전담 부서를 신설해 폐배터리, 폐전자기판(PCB) 등에서 금·은·인듐 등 희소금속을 회수했다. 그의 철저한 기술주의와 환경경영은 고려아연을 ‘녹색 제련소’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의 리더십 아래 고려아연은 아연 생산능력 5만 톤에서 65만 톤으로, 매출은 114억 원에서 12조 원으로 성장했다. 시가총액은 20조 원에 육박하며 ‘100년 기업’의 초석을 다졌다.
◇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잡는 법을 알려줘야 한다”
최 명예회장은 부친이자 창립자인 고(故) 최기호 초대회장의 가르침대로 사회공헌에도 앞장섰다.
그는 “손에 쥔 재산은 잃을 수 있지만, 머리에 든 재산은 잃지 않는다”며 교육과 인재 양성을 중시했다.
1981년 명진보육원 후원을 시작으로 장학사업을 이어왔고, 임직원 전원의 급여 1% 기부 운동을 펼쳐 사회공헌의 조직문화를 만들었다. 그와 가족은 모두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등록돼 있다.
이 같은 공로로 그는 2013년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 “고려아연은 모두의 회사”…‘가족 같은 리더’로 남다
최 명예회장의 후배인 이제중 부회장은 “회장님은 고려아연을 최씨 가문의 기업이 아니라 모든 임직원의 회사로 여기셨다.
직원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필요하다면 제도도 바꿔가며 함께 성장하길 원하셨다”고 회고했다.
최 명예회장의 이런 철학은 지금도 고려아연의 조직문화에 깊게 스며 있다. 그가 남긴 경영원칙 ‘사람 중심’, ‘정도경영’, ‘꾸준한 변화’는 여전히 회사의 핵심 가치로 이어지고 있다.
◇ “기업은 멈추면 죽는다…100년 가는 회사가 위대한 회사”
최 명예회장은 생전에 “기업이 성장을 멈추면 그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회사는 사람처럼 계속 진화해야 한다. 그래야 100년을 간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고려아연은 지금도 진화 중이다. 올해 상반기 연결기준 매출 7조 6582억 원을 기록하며 사상 최대 반기 실적을 냈고 최근엔 세계 1위 방산기업 록히드마틴과 협력 논의에 참여하며 글로벌 공급망 강화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최창걸 명예회장이 남긴 건 숫자나 실적 이상의 ‘기업 정신’이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혁신이나 개혁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늦은 것이다.
매일매일 조금씩 발전해 나가면 한꺼번에 큰일을 할 필요가 없다.
개혁보다는 변화가 중요하다.”
자원 빈국 대한민국에 ‘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기업’이라는 신화를 세운 그의 철학은, 이제 고려아연을 넘어 한국 산업계 전반의 교과서가 됐다.
그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정도경영’과 ‘꾸준한 변화’라는 철학은 여전히 고려아연의 심장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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