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치 하면서 아내와 아이들 행복 막아 버렸다"

문화 / 신현호 / 2010-05-23 14: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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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前대통령 서거 1주기 ‘운명이다’...꿈과 희망, 실패와 좌절 이야기

[일요주간=신현호 기자] “2009년 5월 23일 아침 우리가 본 것은 ‘전직 대통령의 서거’가 아니라 ‘꿈 많았던 청년의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우리 민주주의의 청춘이었다. 양김 분열과 3당합당, 정치인들의 기회주의와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거치며 모두가 중년으로 노년으로 늙어 가는 동안, 그는 홀로 그 뜨거웠던 6월의 기억과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가슴에 품고 씩씩하게 살았다. 잃어버린 청춘의 꿈과 기억을 시민들의 마음속에 되살려 냈기에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던 시절에도 대통령을 마친 후에도 그는, 꿈을 안고 사는 청년이었다.” ― 유시민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1주기를 맞아 노무현재단과 돌베개가 함께 ‘노무현 사후 자서전’을 펴냈다. 고인이 남긴 저서, 미발표 원고, 메모, 편지 등과 각종 인터뷰 및 구술 기록을 토대로 출생부터 서거까지를 일목요연하게 시간 순으로 정리한 책이다.


‘대북 송금’ 특검 사건 관련 배경 등 처음 공개되는 이야기들이 많고 또 무엇보다 어린 시절부터 서거 직전까지 삶 전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들에 대한 고인의 솔직한 심경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고인의 모든 자필, 구술 기록물들을 살펴 일대기로 정리하고, 빈틈은 유족과 지인들의 인터뷰, 공식 기록 등을 통해 보완했다. 또 고인이 남긴 여러 기록들 중 퇴임 후 서거 직전의 미완성 회고록 노트를 기본으로 문체를 통일하는 작업도 거쳤다.


<일요주간>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아 출간된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의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해 그의 파란만장 했던 삶을 조명해봤다.

제도권 정치로


나는 좋은 남편도 아니었지만 좋은 아버지였던 것도 아니다.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후로는 아이들에게 시간을 쓰지 못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아이들을 키웠는데, 정치를 하는 동안 집에서 아침 먹을 때 말고는 아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거의 없었다. 네 식구 모두 모이는 기회는 그때뿐이었다. 아내는 이 시간을 가장 귀하게 여겼다.


건호가 군에 갈 때 몇 번이나 약속을 하고서도 가족사진 찍을 시간을 내지 못해서 결국은 옛날 찍었던 사진을 가지고 갔다. 면회도 한 번밖에 가지 않았다. 보통 국민들이 돈 걱정 취직 걱정 덜 하고 억울한 일 당하지 않으면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정치의 목적인데, 정작 정치를 하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정치에 무엇을 바쳤는지는 헤아릴 수가 없다. 바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말하기가 어렵다. 그런 것이 정치인의 삶이다. 아내가 정치 입문을 그토록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은 이 모든 것들을 본능적으로 예측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결국 정치를 함으로써 아내와 아이들이 행복하게 사는 길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김영삼 총재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였다. 개인적으로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소박하게 판단했다. “국회의원이 되면 노동자들을 돕는 데 유리할 것이다.” 민주화운동을 한 동지들과 이 문제를 놓고 진지하고 치열하게 토론했다. 처음에는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나중에는 대선 패배로 인한 6월 민주항쟁의 좌절을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루었다. 더 진보적인 김대중 총재의 정책노선에 관심이 있다고 해도 부산에서 국회의원이 되려면 통일민주당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선되기에 수월한 지역구를 고르라는 김영삼 총재의 호의를 사양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 동구를 선택했다. 상대가 모두들 기피하던 전두환 정권의 실세 허삼수 씨였기에 거기에는 지원자가 없었다. 이왕이면 센 상대와 대결하고 싶기도 했고, 그가 전두환 대통령의 왼팔로 통한 5공화국 독재의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에 민주화운동 세력을 대표해서 이기고 싶었다. 허삼수 선거캠프에는 주먹들이 많다는 소문이 돌았다. 선거운동원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된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 허삼수 후보 선거사무소를 찾아갔다. 가서 인사를 하고 정정당당하게 겨루어 보자고 말한 다음 아무 일없이 돌아왔다.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5공비리특위 청문회


당에서 정주영 회장이 고령인 데다 업적이 많은 기업인이니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다른 증인들한테는 고함을 치고 욕설까지 했던 의원들이 정주영 회장에게는 회장님 소리를 해 가며 예우를 했다. 문을 열어 주며 과잉 친절을 베푸는 의원도 있었다. 대한민국은 확실히 돈이 말하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국민들은 일해재단 문제를 ‘강제 모금’이 아닌 ‘정경유착’으로 판단했다. 모금의 강제성만 따지면 재벌 회장들은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뇌물을 바치고 사업의 특혜를 받는 정경유착이라면 전두환 정권과 재벌 회장들은 가해자 공범이 되고 국민이 피해자가 된다. 국민들은 법률과 상식을 짓밟으면서 권력을 휘두른 전두환 정권과, 그 권력에 야합하여 이권을 챙겨먹은 기업인 모두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으며, 국민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이 분노를 대변해 주기를 기대했다. 나는 ‘정경유착’의 실상을 파헤치고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증인 심문을 했다.


정주영 회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봐 주지 않았다. 온 국민이 보는 가운데 당당하게 “나는 시류에 따라 산다”고 말했던 정주영 회장이 마침내 말문이 막혔다. 결국 바른 말을 하는 용기를 가지지 못했던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가 청문회에서 돋보이게 되었던 것은 국민들과 눈높이가 맞았기 때문이었을 뿐, 특별한 기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집과 의원회관 전화는 아예 불통이 되었다. 내 기사가 실리지 않는 신문 잡지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정치인으로서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었다. 그런데 보도가 하나같이 입지전적 성공담으로 흘렀다. 집이 가난해 대학도 못 간 사람이 사법고시에 붙었고 국회의원이 되었고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는 식이었다. 불우한 사람을 만들어 내는 사회 구조를 변혁하고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 정치 활동의 목표라고, 내가 주로 하는 일이 그것이라고 누누이 강조를 했지만 기사에는 모조리 잘려나가고 없었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정보화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컴퓨터에 재미를 붙였다. 연구소에 많은 자료가 쌓이고 있었다. 10명의 연구원들이 한 달에 한 차례 이상 세미나를 했다. 발표와 토론 자료뿐만 아니라 회원들의 개인 정보와 전문가들이 만든 참고 자료, 수입과 지출 관련 정보들이 축적되었다. 그런데 이 정보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인명 자료는 주소와 전화번호 변경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각자 하는 일에 대한 보고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 소통도 원활하지 않았다. 유용한 정보를 일상적으로 업데이트하고 누구나 손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그런 시스템을 돌리는 소프트웨어를 만들기로 했다.


처음에는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해 150만 원 예산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이 굴러가면서 눈덩이처럼 커졌다. 비용이 700만 원으로 늘어나더니 급기야 6000만 원짜리 프로젝트가 되었다. 나중에는 그것도 다 걷어치우고 2억 원을 개발비로 투입해서 ‘노하우’라는 업무표준화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이 프로그램을 대통령후보 때 사용했으며, 대통령이 된 후에는 ‘e-지원’이라는 청와대 업무관리 시스템으로 발전시켰다. 특허도 받았고 임기 말에는 중앙정부 행정부처에도 확산시켰다.


‘노하우’를 개발하면서 데이터베이스를 공부했고 컴퓨터 프로그램의 종류와 원리를 익혔다. 정치 활동과 연구소의 업무 전반에 대해 직접 직무분석을 했다. 정보 축적과 재활용 시스템을 만드는 프로그램 기획안도 내 손으로 직접 썼다. 내가 원하는 시스템 전체의 구조와 요구 사항들을 종이에 일일이 적었다. 두툼한 바인더로 10권이나 되는 주문서를 만들었다.


A4지로 300쪽 정도 분량이었다. 그 다음에는 서류도 없이 받아 적게 하면서 다섯 시간에 걸쳐 설명했더니 프로그래머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프로그램을 다시 만들어 오면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확인했더니, 이 사람들이 나를 만나는 것 자체에 겁을 먹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일정, 인명 정보, 자료와 회계를 전부 통합했다. 인명 데이터베이스를 기초로 수천, 수만 개의 명부를 생산하고 축적하는 틀을 만들었다. 하지만 상품화해서 투자비를 회수하는 데는 실패했다. 업무 분석과 표준화가 지나치게 세밀해서 상품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지식공유 시스템의 기본 개념을 알게 되었다.


기회주의와의 싸움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씨는 원래 서로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관계였다. 이회창씨는 대쪽이라는 이미지로 김영삼 대통령의 초법적 국정운영에 반기를 들어 인기를 얻었던 사람이다. 그런 두 사람이 절묘하게 타협을 한 것이다. 그 두 사람으로 하여금 손을 잡게 만들었던 것은 대구와 충청도의 이반이었다.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정치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조선 건국 이래 600년 역사에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정권교체가 없었다. 권력의 편에 서야만 비로소 권력을 이어받을 수 있었던 역사였다. 권력에 맞섰던 사람 가운데 패가망신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자손들의 앞길까지도 막아 버렸다. 적어도 무사하게 밥이라도 먹고 살려면 권력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시비를 가리지 말고 납작 엎드려 살아야 했던 기회주의 역사가 무려 600년이었다. 결국 이회창씨도 조순씨도 권력에 줄을 서야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쪽으로 간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역사를 마감하고 양심과 신념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세상을 만들려면 정권교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1998년 종로구 국회의원 당선


서울시장 꿈을 버리지 못했다. 당에서는 한광옥 씨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당내경선 후보로 등록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찾아가 여론조사 결과를 드렸다. 한광옥 씨는 한나라당 최병렬 후보를 이기지 못하지만 나는 이기는 조사 결과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서울시장보다 종로지구당을 맡으라고 권했다. 며칠 후 이강래 정무수석이 찾아와 고건 씨를 후보로 하는 것이 대통령 뜻이라고 했다. 그가 ‘성공시대’라는 텔레비전 프로에 출연한 후로 지지율이 솟구쳤다는 것이다. 나는 이 결정에 승복하고 종로지구당을 맡았다.


매몰차게 공격했던 과거사 때문에 무척 민망했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조직을 인수받았다. 장차 종로에 복귀할 생각이 있어서 조직을 잘 넘겨 주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종찬 부총재는 옛날 일을 하나도 따지지 않고 성의껏 조직을 인계하고 당원들을 설득해 주었다. 덕분에 별다른 애로사항 없이 보궐선거를 잘 치러 낼 수 있었다. 이광재, 안희정, 백원우 등 젊은 참모들이 모두 종로에 와서 조직을 인수하고 선거운동 준비를 했다. 1998년 7월 21일,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국회의원 선거 두 번, 부산시장 선거 한 번, 모두 세 번 낙선한 끝에 맛본 10년 만의 승리였다. 이 선거를 치르면서, 그동안 너무 내 논리만 가지고 까다롭게 정치를 해 온 것을 반성했다. 이종찬 씨에 대해서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제16대 총선을 부산에서 출마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1999년 2월 9일,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지 반 년, 총선을 1년 2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지역 분열을 더 부추겨서는 안 됩니다. 동서통합을 위해서 부산 경남 지역으로 갑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내심 ‘이익을 위한 정치’와는 다른 ‘희생의 정치’로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언론보도는 내 희망과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이종찬 씨에게 지역구를 돌려주기로 밀약”, “당내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것”, “여당 지도부의 동진 정책 전략의 일환”이라는 등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그나마 “대권을 향한 노무현의 승부수”라는 기사가 제일 잘 써 준 것이었다. 안타까움을 넘어 좌절감을 느꼈다. 이종찬 씨는 종로 지역구를 되찾으려 하지 않았다. 나도 미리 그와 상의하지 않았다. 선거를 1년 넘게 앞두고 발표한 것은 순전히 한나라당의 영남권 집회 때문이었다. 어차피 부산으로 가기로 마음먹은 것,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 하루라도 빨리 경고를 하고 싶어서 그 시점을 택했던 것이다.


종로구청 강당에 지구당 당직자와 지역 유지들이 모였다. 참으로 미안한 자리였다. 종로에 국회의원다운 국회의원이 왔다고 좋아한 당원이 많았다. 그런데 6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부산으로 간다고 선언을 했으니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을까? 나도 슬펐다. 종로는 너무나 좋은 곳이었다. 동네 생김새가 그림 같았다. 롯데호텔에서 바라보는 청와대의 모습도 좋았고, 곳곳에 체육공원과 약수터가 있어서 건강 관리와 선거운동을 동시에 할 수 있었다. 마지막 당직 인선을 발표한 다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하다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 하는 것이지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고 간곡하게 용서를 청했다. 반쪽 정권을 극복하려면 여당이 꼭 전국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분위기가 숙연해지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사람들이 전부 박수를 쳤다. 왈칵 눈물이 났다. 찔끔이 아니고 펑펑 쏟아졌다. 왜 그리 울었는지 모르겠다.


부동산 정책


강력한 LTV와 DTI 규제를 투입한 시점은 부동산 투기 열풍이 전국을 휩쓸던 2006년 11월 15일이었다. 당시 언론보도는 온통 부동산 뉴스밖에 없었다. 아파트 분양 사무소 앞에 사람들이 밤새 장사진을 쳤다. 불안해진 서민들이 금리가 높은 제2금융권 대출을 받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서울 강북의 소형 아파트와 지방의 아파트 값까지 덩달아 뛰어올랐다. 미국과 유럽 부동산 가격 하락이 시작되었고 종부세 본격 시행이 임박했으며 정부가 고강도 대책 투입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도자료를 내보냈지만 국민들은 정부를 믿지 않았다. 『한국일보』 경제부장 출신인 이백만 홍보수석이 청와대 브리핑에 글을 하나 올렸다. 지금 값이 너무 올라간 집을 샀다가는 자칫 낭패를 볼 수 있으니 서민들은 조금 기다렸다가 정부의 대책을 보고 나서 집을 사는 게 좋겠다고 권유하는 글이었다.


언론들이 난리가 났다. 모든 미디어가 ‘집 사면 낭패’라는 제목을 달아 청와대와 홍보수석을 비난했다. 문책 경질하라는 사설이 줄을 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왜 강남에 사느냐는 인신공격과 아파트를 편법 분양받았다는 의혹 제기까지 나왔다. 민정수석실에서 조사를 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백만 홍보수석에게 이메일을 보내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문제로 11·15조치의 초점이 흐려질 우려가 있다며 사표를 냈다. 11월 15일 강력한 대출 규제 조처를 시행해 투기자금의 입구를 막아 버렸다. 이백만 수석은 그 다음날 청와대를 떠났다. 그때 정부를 불신하면서 대출을 받아 집을 산 사람들은 해가 바뀌기도 전에 정말로 큰 낭패를 보았다. 적기에 적절한 정책 수단을 투입해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면 이런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신행정수도


묵은 과제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것이 신행정수도 건설이었다. 나는 원외 정치인 시절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하면서 이 문제를 공부했다. 서울과 수도권이 돈과 자원과 인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상황이 계속되면 헌법이 명한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서울은 서울대로 인구 과밀화, 환경 악화, 혼잡비용 증가, 부동산 가격 폭등 때문에 경쟁력을 가지기 어렵게 되고, 지방은 지방대로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고 말라죽을 것이라는 우려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에 벌써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충청권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국가의 균형 발전을 이루고 서울의 도시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수도의 행정 기능을 분리해 국토의 중심지역으로 옮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봉하쌀 농사 사업


처음 왔을 때 화포천은 그야말로 끔찍한 상태였다. 화포천 유역 공단에서 불법 방류한 공장 폐수, 끝없이 흘러드는 생활 오수와 축산 폐수, 불법 투기한 대형 폐기물과 낚시 쓰레기까지, 화포천은 그야말로 숨이 막혀 죽어가고 있었다. 김해시장과 경남지사에게 말해서 청소부터 시작했다. 화포천 바닥에 버려진 불법 그물과 지천에서 떠내려 온 쓰레기를 끝도 없이 치웠다. 1t 화물차로 백 대가 훌쩍 넘었다. 본산공단에서 흘러들어 와 봉하마을 농수로에 쌓인 슬러지에서 악취가 났다.


친환경 농사를 하자면서 방치할 수가 없어 농어촌공사에 지원 요청을 했다. 준설한 슬러지가 15t 덤프트럭으로 백 대가 넘었다. 퍼낼 데가 없어서 큰 논을 빌려 임시로 쌓아 두었다가 겨우 처리했다. 화포천 곳곳에 불법으로 설치한 그물이 깔려 있었다. 어느 날은 삼강망에 팔뚝만 한 잉어가 수십 마리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버려져 뻘에 묻힌 삼강망을 35개나 제거했다. 그렇게 하자 낙동강 잉어가 화포천을 거쳐 얕은 농수로까지 올라와 산란을 했다. 볼 만한 풍경이었다. 어디 화포천만 이렇겠는가. 온 나라가 다 이럴 것이다. 대통령을 하면서 강의 지천과 실개천, 습지들이 이토록 처참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몰랐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건평 형님이 구속된 다음날 마지막 방문객 인사를 한 후로는 집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집에서 내다보면 겨울철새가 많이 보였다. 내가 외출을 하지 않으니까, 집에서라도 보라고 김정호 비서관이 열심히 무논을 만들어 기를 쓰고 철새를 불러 모으는 것 같았다. “우리 잘하고 있습니다. 한번 나와 보세요.” 새를 불러 모아 시위를 한 것이다. 기특하고 고마웠다. 새벽에 사람이 없을 때 잠깐씩만 가끔 나가 보았다.


내가 마을 사업을 하면서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었던 모양이다. 한동안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다. 자전거 타는 사진은 주로 화포천 관련 활동과 관계가 있다. 논바닥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거나 장화를 신고 다니는 사진은 벼농사 아니면 화포천 청소와 관련된 것이다. 숲 가꾸기 사진도 제법 있었다. 어떤 기자가 우연히 내가 쉼터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사진을 찍어 내보냈다. 나가지 말아야 할 사진이 나간 경우였다. 손녀와 아이스크림 먹는 사진은 나가지 말아야 할 것은 아니지만 조금 쑥스러운 장면이었다. 농사짓고 숲 가꾸고 개울 청소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모습으로 다닌다.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다만 대통령 지낸 사람이 그렇게 하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기지 않았나 싶다.


운명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해 보고 싶었던 꿈을 모두 다 접었다. 죽을 때까지 고개 숙이고 사는 것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재판 결과가 어떠하든 이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20년 정치인생을 돌아보았다. 마치 물을 가르고 달려온 것 같았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고 믿었는데, 돌아보니 원래 있던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통령은 진보를 이루는 데 적절한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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