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며 단일 종목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스포츠행사가 ‘월드컵’이다.
전 세계인을 4년에 한번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월드컵’은 어린아이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스포츠이다.
그 긴 세월동안 50년을 함께한 대한민국 축구는 현재 ‘아시아 최강국’, ‘아시아 최다 본선진출국’ 이라는 칭호를 거머쥐며 명실상부 아시아 축구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거듭났다.
이제는 국민들이 ‘아시아 최강’이라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지만 반백년의 역사 속에서 고난과 역경을 반복해온 한국월드컵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하는 궁금증은 당연한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을 웃고 울게 만드는 세계 최대의 축제 월드컵 속 한국축구의 발자취를 돌아봤다.
한국축구의 역사는 1954년 스위스월드컵부터 시작됐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삼국시대부터 전해질 만큼 상당히 오래됐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축구는 신라시대부터 가축의 방광 등을 이용해 공차기를 하던 ‘축국(蹴鞠)’이라는 놀이형태와 유사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축구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1882년(고종 19년) 한국에 상륙한 영국군함 승무원들을 통해서 인 것으로 알려졌다.
본격적으로 체계가 잡히고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첫 월드컵이 개최된 190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축구의 시작은 월드컵의 역사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축구 서막을 알리다!!
현재 한국축구는 1954년 ‘스위스월드컵’ 본선에 첫 발을 내딛은 이후 2010년 ‘남아공월드컵’까지 총 8회에 걸쳐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았고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룩하는 등 점점 진화해가고 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월드컵 도전 시련의 연속
6.25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대한민국의 월드컵 본선진출은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불씨가 됐다.
당시 어웨이로 치러진 일본과의 지역 예선에서 한국대표팀은 1차전에서 5대1 역전승, 2차전을 2대2 무승부로 비기며 총 전적 1승1무로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지역 출전 티켓을 거머쥐게 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작 본선에 진출했음에도 월드컵이 개최되는 스위스로 가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스위스행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해 일단 일본으로 건너간 대표팀 22명은 프랑스 항공기와 미공군기로 각각 나눠 탔다.
장장 60시간에 걸친 장시간 비행 끝에 출발한지 일주일 만인 개막일 밤에 도착하여 피로도 풀지 못한 채 경기에 나서야 했다.
물론 실력도 부족했지만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제대로 된 경기력이 나올 리 만무했다.
그 결과 헝가리와의 첫 경기에서 9대0으로 패배, 터키와의 2차전 역시 7대0으로 참패를 당해 고배의 쓴잔을 마시며 월드컵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대한민국은 1958년 ‘스웨덴월드컵’에서 지난 대회 설욕을 굳게 다짐했지만 아쉽게도 월드컵 담당직원이 신청서류를 분실하는 헤프닝이 벌어지며 출전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한국은 1962년 ‘칠레월드컵’,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 1970년 ‘멕시코월드컵’, 1974년 ‘서독월드컵’, 19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 1982년 ‘스페인월드컵’에 꾸준히 문을 두드렸지만 사우디 등 중동아시아 국가들의 강세가 지속되면서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한국축구가 연이어 고배를 마시는 사이 이변도 속출했다.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 당시 본선에 진출한 북한이 강호 이탈리아를 꺾으며 8강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
한국 월드컵 사상 첫 승점
한국축구의 위상을 알리고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된 월드컵이 바로 ‘멕시코월드컵’이다.
한국대표팀은 1954년 이후 김호, 차범근, 허정무, 김진국, 김정남 등 걸출한 스타플레이어 등을 배출하며 월드컵 본선진출의 꿈을 키웠지만 월드컵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드디어 1986년 월드컵에 도전한지 여덟 번 만에 한국월드컵 사상 두 번째로 본선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렇다고 쉽게 본선에 진출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이 연달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하는 사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 역시 가만히 손놓고 있지는 않았다.
몇 년 사이에 실력들이 급성장하며 한국은 지역예선부터 탈락할 뻔한 고비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김주성, 김종부 등 스타플레이어들이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지역예선 2차전에서 일본을 2대0으로 누르고 본선에 진출하게 됐다.
그러나 본선은 역시 본선이었다.
본선 24개 팀 중 최약체로 평가되던 한국은 조편성에서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불가리아 등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되며 단 1승도 올리지 못하고 탈락하고 말았다.
6월 2일 아르헨티나와의 첫 경기. 한국도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차범근, 신예 김주성 등을 앞세워 단단히 채비를 갖추고 경기에 임했지만 당시 우승을 차지한 아르헨티나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특히 현재까지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불리고 있는 ‘마라도나’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점은 최강팀을 만나 월드컵 사상 첫 골을 넣은 것이다.
두 번째 상대 불가리아와의 경기는 한국월드컵 사상 가장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후반 김종부의 천금 같은 동점골이 터지며 1대1 무승부로 감격의 첫 승점을 올렸다는 점이다.
마지막 이탈리아와의 경기 역시 한국은 경기시작 7분 만에 최순호가 선취골을 만들어내며 예상외의 강한 모습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일부 외신과 도박사들은 한국이 이탈리아를 누르는 이변이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조심스럽게 한국의 16강 진출을 점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유럽과 남미가 축구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깊게 박힌 세계 축구계에서 한국이 강호 이탈리아를 꺾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월드컵 역사상 가장 불미스러운 경기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이 경기는 한국이 먼저 득점을 하자 어이없는 파울 선언 등으로 한국의 첫 16강 진출이라는 꿈을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다행이라면 이 대회를 통해 한국 축구의 실력이 한층 성장했으며 세계에서도 충분히 통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한국축구는 그 상승세를 이어 점차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 영향 때문인지 대한민국은 최근 개최된 2010년 ‘남아공월드컵’까지 한회도 빠지지 않고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게 된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조편성 행운에도 불구하고 실력차 실감
한국월드컵 사상 가장 좋은 조편성을 받은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은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한국의 16강 진출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본 결과 같은 조에 편성된 ‘무적함대’ 스페인, 벨기에, 우루과이 모두 녹록치 않은 상대였다.
수준차이로 인해 어느 정도 질 것으로 예상됐던 스페인과의 경기야 그렇다 쳐도 나머지 두 팀과는 박빙이 될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두 팀에게 모두 패배하며 세계의 벽이 높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됐다.
1994년 미국월드컵
한국 최강 스타군단 아쉬움 남겨
‘미국월드컵’하면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를 비롯해 고정운, 황선홍, 서정원, 하석주 등 쟁쟁한 스타들이 먼저 떠오른다.
1994년은 당시 분위기상 한국은 ‘역대 최강’이라 불리우며 지역예선은 통과는 물론 16강 진출도 희망적이라고 자화자찬하며 국민 모두를 들뜨게 만들던 시기였다.
아마 축구를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면 그런 생각을 한번쯤 했을 정도로 1차 예선까지 분위기는 최고였다.
너무 분위기가 좋았던 탓일까?
2차 예선에서 이라크, 사우디와의 무승부, 생각지도 못한 일본에 패배를 당하며 상대팀 경기결과에 본선진출이 점쳐질 정도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마지막 반전이 숨겨져 있었다.
모두들 본선진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본선 진출이 확실시 됐던 일본이 후반 루즈타임 이라크에 통한의 동점골을 허용함으로써 골득실차에 앞선 한국이 어렵게 본선에 진출하게 됐다.
한국은 힘겹게 올라온 만큼 16강 진출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상대는 독일, 스페인, 볼리비아 결코 쉬운 상대들은 아니었다.
첫 상대 스페인과 두 번째 상대인 우루과이와 무승부를 기록하며 사상 첫 16강 진출의 한줄기 빛이 보이는 듯 했으나 마지막 상대 독일과의 경기에서 3대2로 아쉽게 패배하며 2무 1패의 성적으로 다시 한 번 좌절을 맛봐야만 했다.
이 대회를 치르면서 한국 축구의 미래를 볼 수 있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며 이후 한국 축구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한국축구의 끈기 세계에 각인
‘프랑스월드컵’하면 선수들의 끈기와 이임생 선수의 ‘붕대투혼’이 먼저 떠오른다.
또한 “실력도 모자라면서 몸으로만 축구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 첫 선제골”, “한국 축구의 포기하지 않는 끈기에서 가능성을 봤다”등 많은 혹평과 비평을 받은 대회로도 기억되고 있다.
‘프랑스월드컵’은 차범근 감독이 처음으로 지휘봉을 잡고 지역예선에서도 6승 1무 1패라는 최상의 성적으로 무난히 본선에 진출하면서 세계적인 강팀과 붙어도 쉽게 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까지 더해져 16강 진출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조 편성 역시 세계적인 강팀이었지만 상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평가했던 벨기에, 멕시코, 네덜란드 등과 한조에 속하며 분위기는 한껏 고취됐다.
더불어 멕시코와의 첫 경기에서 한국월드컵 역사상 첫 선제골이 터질 때만 해도 첫 승은 물론 16강 진출도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는 듯 했으나 3대1로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최강 전력으로 월드컵 우승팀으로까지 꼽혔던 네덜란드와의 2차전에서는 5대0으로 대패하며 3차전 벨기에와의 경기와는 상관없이 한국축구의 월드컵 도전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다만 위안이 되는 점은 사실상 16강 진출이 좌절됐으면서도 ‘붕대투혼’ 등을 펼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정신으로 무승부를 일궈내고 한국축구의 끈기를 세계에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역대 최고 성적 꿈의 4강 진출
‘월드컵 개최국’, ‘붉은악마의 태동’, ‘월드컵사상 최고의 성적’, ‘한국축구의 저력’, ‘대한민국 국민의 단결력’, ‘박지성의 발굴’, ‘히딩크 효과’ 등 가장 많은 이슈를 남긴 월드컵으로 세간에 기억되고 있다.
2002년에는 월드컵 역사상 유래없는 한국과 일본의 공동 개최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며 시작됐다.
2002년 월드컵에서는 1998년 월드컵 우승팀 프랑스, 아르헨티나, 포르투칼의 조별리그 탈락 등 쟁쟁한 강팀들이 16강에 오르지 못하는 이변이 속출되기도 했으며, 최약체로 평가됐던 세네갈, 미국, 대한민국, 터키 등이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냈다.
우승을 점칠 수 없는 이런 진흙탕 속에서도 월드컵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브라질은 호나우두 등의 활약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한국은 우선 일본과 함께 월드컵 개최국의 특혜를 받아 본선에 자동 진출했다.
목표는 16강 진출이었으나 한국 축구는 16강을 넘어 4강에 진출하며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미국, 포르투칼, 폴란드와 한조에 편성된 한국은 ‘피구’가 버티고 있는 포르투칼을 제외하고 미국과 폴란드를 공략하여 16강에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첫 상대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한국은 고전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으로 깨고 뛰어난 경기력을 선보이며 황선홍의 선취골과 유상철의 추가골로 비교적 손쉽게 1승을 올리며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2차전 미국과의 경기에서 1대1로 비기면서 16강 진출이 어려울 것으로 전망됐지만 한일월드컵 사상 가장 큰 이변 중의 하나로 꼽히는 포르투칼과의 경기에서 후반 25분 박지성의 천금 같은 골로 48년 만에 온 국민이 염원하던 16강 고지에 올랐다.
이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번 분위기를 탄 한국의 기세는 매서웠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 어느 누구도 한국의 승리를 점치지 않았지만 모두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2대1로 승리하며 8강에 진출했다.
8강 스페인과의 경기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승부차기 끝에 ‘무적함대’ 스페인을 침몰시키고 4강이라는 영광을 품에 안았다.
이런 상황에 되자 당시 국내 언론과 외신들은 한국이 혹시 우승컵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기사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강팀과 두 번의 연장을 거치며 체력이 떨어질데로 떨어진 한국은 4강전에서 비교적 손쉬운 상대로 평가됐던 독일에 아쉽게 1대0으로 패배하며 첫 우승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2006년 독일월드컵
2002년 한일월드컵 재현 실패
독일월드컵은 2002년 ‘한일월드컵’의 재현을 꿈꾸며 다시 한 번 도전에 나섰지만 1승 1무 1패의 성적으로 첫 원정 16강이라는 원대한 꿈을 또 다시 접어야만 했다.
스위스, 프랑스, 토고와 한조에 편성된 한국은 2002년 4강의 주역들이 버티고 있는 만큼 그 어느 때보다 16강 진출에 대한 염원이 강했다.
사실상 2002년에는 개최국의 이점 때문에 한국이 4강에 올랐다는 말들이 많았던 만큼 한국축구의 저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대회였다.
토고와의 첫 경기에서 2대1로 승리하고 가장 강한 상대라 생각했던 프랑스와 1대1로 비기면서 최소한 마지막 상대인 스위스와 비기기만 해도 16강 진출이 가능한 만큼 당연히 오를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프랑스 보다 뛰어난 경기력을 선보인 스위스에 2대0으로 패하며 아쉬움을 남긴 채 돌아와야 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한국 첫 원정 16강 진출 쾌거
한국의 원정 첫 16강 진출의 꿈의 이뤄준 남아공월드컵.
월드컵 사상 첫 ‘아프리카 대륙 개최’, ‘개최국의 탈락’, 프랑스, 이탈리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강팀들의 대거 탈락을 포함해 많은 이슈를 남긴 월드컵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도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로 숱한 이슈의 중심에 있었다.
한국은 그리스,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와 만나 1승 1무 1패의 성적으로 16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리스와의 첫 경기에서 2대0으로 비교적 쉽게 승리를 했지만 아르헨티나와의 2차전에서 4대1로 대패하며 16강이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이지리아와의 마지막 승부에서 무승부를 기록하고 아르헨티나에 이어 조별 2위로 16강에 진출하며 한국축구의 저력을 만방에 떨쳤다.
승리의 역사 창조
2010년 남아공월드컵 이후 한국축구는 눈부신 성장을 했으며 더 높은 곳을 향해 비상하고 있다.
박지성 비롯해 많은 젊은 선수들이 유럽의 빅리그에서 맹활약 중이며 각종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으로 거두고 있다.
2018년 월드컵 단독 개최의 꿈은 카타르에 빼앗겨 깨졌지만 한국 축구는 반백년을 지나오면서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온 만큼 큰 승리의 역사를 만들어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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